회화는 어떻게 세계를 여는가

 

Painting itself. 회화 자체. 샌정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이지만, 어느정도는 작가의 그림 전체에 해당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주제의식은 때로 텍스트의 형태로 그림 속에 삽이되기도 한다. Malerei unserer Welt. 우리 세계 안에서의 회화란 의미의 독일어다. 이처럼 그 의미는 우리 세계 안에서의 회화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 해당하는 단어를 회화로 보고, 회화와 회화가 겹치는 강조 화법으로 보고, 따라서 회화의 세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회화 자체를 묻는 주제의식은 그림 속 텍스트로 나타난 회화의 세계로 재차 강조된다.

 

회화 자체? 회화의 세계? 이 주제의식이며 텍스트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상기시킨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회화 자체로부터 온다는 식의 소위 예술의 자율성이며 회화의 내재율이다. 뭔가를 재현하기보다는 회화가 뭔지 묻는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 회화이며 메타회화이다. 회화가 뭔지를 묻는 회화? 이건 그대로 비평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 그림 속에 비평적 행위를 포함하고 수행한다는 점에서 회화적 주체와 비평적 주체, 회화적 행위와 비평적 행위가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회화에 대한 연구(스터디 페인팅)로 여기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회화 자체나 회화의 세계란 결국 회화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회화는 어떻게 자기 본성을 실현하는가. 니체는 예술 충동을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구분했다. 일종의 내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충동과 해체와 활력을 추구하는 충동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면서 부침하고 충돌하고 조화를 이룬다. 형식주의와 생명주의(바이털리즘)의 대비로 볼 수 있겠고,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이성과 감성의 대비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형식주의와 생명주의, 이성과 감성, 회화의 본성과 작가의 자기 표현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고 대비되면서 팽팽한 그리고 때론 느슨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렇게 작가에게서 회화쪽으로 건너간 것들, 이를테면 재현은 상징이되고, 서사는 알레고리가되고, 풍경은 색점이나 생면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에게서 발원한 것들은 회화의 본성, 이를테면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회화의 형식요소에 묻히거나 그 뒤편으로 사라진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생각의 응어리라고, 특히 사색의 침전물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본성은 회화의 본성밑으로, 화면 아래쪽으로 가라 앉는다. 여기서 생각과 사색은 말할 것도 없이 회화에 대한 생각이며 회화의 본성에 대한 사색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회화로 환원하는 일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회화와 일체를 이룬, 그리고 그렇게 주와 객을 분별할 수 없는(동양으로 치자면 물아 일체, 그리고 서양의 경우에는 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 개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어떤 지경이며 차원에 대한 사색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가 그 보성을 실현한 지경, 회화의 본성과 자신의 본성이 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 지는 차원에서야말로 마치 우주의 행성과도 같은, 그 자체 독립된 별과도 같은 한 세계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에다 비유한다. 예술이 아니라면 존재하는 예술의 매개로 인해 비로소 열리는 한세계이다.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세계, 작가가 열고 싶은 세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고충환 미술평론